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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2020.03.16

영화 그리고 여자

누군가의 여자친구, 엄마로 존재하기에 우리의 이야기는 넓고 깊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69세> 감독 임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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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지위가 많이 높아졌다지만 노년의 여성은 세상 속에서 지극히 외로운 존재다. 거리에서 수없이 마주치지만 좀처럼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는, 도시의 배경처럼 존재하는 여성들. 영화 <69세>는 그런 노년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다. 영화 속 주인공 효정(예수정)은 병원에 입원했다가 남자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이후 함께 사는 동인(기주봉)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중호가 합의를 통해 이뤄진 성관계라 주장하면서 효정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내용이다. 감독 임선애는 2013년 우연히 노년 여성을 타깃으로 한 성범죄 칼럼을 읽은 데서 영화를 시작했다. “노인을 무성의 존재로 보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오히려 가해자들의 타깃이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신고율이 낮을 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요. 또 노인 여성들이 수치심에 신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재범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요. 저항이나 방어가 힘든 약자 중에 약자잖아요. 나이가 들면 제게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고요. 영화 제목을 <69세>라 정한 것도 중년과 노년의 사이 그 어디에 위치한 여성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전엔 60대가 할머니라 생각했는데 60대의 엄마를 보니 중년이라 느껴졌거든요. 나이는 선입견이기도 하니까요.” 현실의 많은 여성과는 다르게 주인공 효정은 자신이 처한 부당함에 강인하게 맞서 싸운다. 이렇게 주체적인 캐릭터를 그려내기까지 효정을 연기한 배우 예수정의 조언이 컸다. “저는 아직 69세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제가 바라본 엄마, 이모의 바운더리에서 효정을 그렸어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원고 하나하나 꼼꼼히 읽으시곤 조언해주셨죠. 제가 효정을 사회적으로 함의되어야 할 존재로 보았다면 선생님은 효정을 실존의 캐릭터로 만드셨어요. 촬영 전까지 11번 정도 원고가 바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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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러 영화제에서 좋은 밥응을 얻은 영화 <69세>. 사회 속 노년 여성의 소외와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켜내는 주인공 효정이 인상적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초지일관 사려 깊다. 효정을 성폭력의 피해자이기 이전에 취향과 의지, 사연이 있는 하나의 인격체로 표현했다. 영화는 아직 개봉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 부문에 선정되었고 KNN 관객상을 수상했다. 또 지난겨울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작으로 선정되었으며, 올해는 해외 영화제의 초청을 기다리고 있다.
<69세>가 감독 임선애의 장편 데뷔작임에도 이만큼의 저력을 자랑하는 데에는 20년간 스크립터와 스토리보드 작가로 현장에서 활동했던 그간의 커리어 덕이다. 그녀는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웹툰, 시나리오 작가 등의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부터는 매일 꾸준히 시간을 내어 시나리오를 썼다. “아이가 신생아일 땐 영화를 더 할 수 있을까?란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잘 만든 영화를 보면 ‘나도 저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돼요. 좋을 걸 보면 시각이 넓어지는 것 같거든요. 영화가 제 삶을 다 덮을 만큼은 바라지 않아요. 제 최애 놀잇감이죠. 노인 여성뿐만 아니라 주류 밖에 있는 인물들에 관심이 많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하고 싶어요.”

<밤의 문이 열린다> 감독 유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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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면 공허함, 허무함이 밀려온다. 감독 유은정의 세계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일상이 대부분 즐겁지만 아무래도 제가 사는 세계는 호러 장르와 닮았어요. 저는 겁이 많고 불안을 잘 느끼는 사람이거든요. 죽음이 가까이 있고 삶에서 위협도 많은데 그게 운 좋게 저를 피해 갈 뿐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호러야말로 세상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실적인 장르로 여겨요. 일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의 영화에는 이유 없이 죽거나 살인자가 되는 사람들이 나와요. 유령은 퇴치의 대상이 아니고 같은 세계의 존재죠. 제가 바라보는 유령의 모습도 그래요.” 이렇게 호러 영화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유은정은 도시 외곽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 혜정이 이유를 모른 채 유령이 되어 깨어난 후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살면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내용의 <밤의 문이 열린다>를 연출했다. 혜정은 살아 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상처와 슬픔을 발견한다.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데에 큰 영감을 준 건 김희천 작가의 비디오 작품 <바벨>이다. “요즘은 죽지 않으려고만 하지 살아 있는 사람이 없어”라는 작품 속 대사를 들으면서 그녀는 ‘죽지 않으려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진짜 살아 있는 게 무얼까’ 고민했다. 그래서 영화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경계와 차이가 명확하지 않다. 극중 등장인물들은 죽어서도 유령이 되어 살고, 사는 동안에도 죽은 듯 고독하게 지낸다. 그게 마치 결혼이나 취업 등에서 희망을 잃고 현상태를 유지하려는 팍팍한 현실의 청춘을 닮았다. 그래서 영화는 몽환적인데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지난해 개봉 당시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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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흐르는 시간과 유령이라는 캐릭터로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호러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호러 영화임에도 여성 캐릭터가 투톱으로 등장한다. 감독으로서 느끼는 부담이 없었냐고 묻자, “장르 자체가 다른 장르 대비 여성의 체력적 한계 등을 이유로 주인공, 악당으로 많이 등장해요. 부담은 조금도 없었어요. 이전에 시나리오 리뷰를 받으면서 제가 만든 남자 캐릭터들이 오히려 가상인물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여성의 이야기, 여성 캐릭터여야 제 이야기 같아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특히 시나리오를 쓰던 2015년만 해도 남성 중심의 영화가 많았고 여성 캐릭터가 장치, 소모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 잘 풀어내고 싶었다고. 그녀는 다음 작품 역시 호러 장르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사실 전 피 튀기는 슬래터 무비는 보지도 못해요. 제가 생각하는 호러의 범주가 참 넓어요. 제겐 <판의 미로>, <렛미인>도 호러거든요. 그래서 더 잘해내고 싶어요. 영화 <4인용 식탁>, <궁녀> 등 여성 감독이 만든 웰 메이드 호러 영화가 많은데 최근엔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수가 확연히 줄었거든요. 유령보다 현실이 무서운 세상이니까 스릴러가 대세로 떠올라서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제작되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여성인데 시선은 남성적인 경우가 많아서 계속 도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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