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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2019.05.07

망한 사내 연애의 전말

순간의 달콤함 이후 감당해야 하는 쓰린 사내 연애의 추억.


흥미로운 성장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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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영화 ‘미스슬로운’
주변에서 뜯어말린 사내 연애를 감행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나간 남자들을 만날 때마다 여자라는 이유로 자꾸 나를 새장 안에 가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새장 속 얌전한 나를 보고 괜한 우월함을 뽐내는 이들을 볼 때마다 귀여우면서도 어딘지 모를 찝찝함이 있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 찝찝한 감정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만남의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같은 조건 아래 서류와 면접, 시험까지 치르고 입사한 사람이라면 내 능력을 누구보다 인정할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회사 생활을 하다 또래의 후배 E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됐다. 그는 내 믿음에 부응이라도 하듯 나를 건강하게 대해줬다. 나를 지키며 연애한다는 말이 이해될 정도로 연애와 삶의 균형 또한 완벽했다. 다시는 이런 남자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을 때, E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우리 회사 특성상 결혼하면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날텐데, 이참에 그냥 회사 그만두고 내조하는 건 어때? 어차피 결혼하면 아기도 낳아야 하고 3년도 못 다니지 않을까?” 내가 강력히 반발하자 그는 내게 현실을 모른다며 되레 화를 내기 시작했다. 회사의 속성을 낱낱이 이해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생각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반자인 줄 알았는데 내부의 적을 키운 느낌이었다.

두 얼굴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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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영화 ‘러브 매니지먼트’
입사 후 1년간의 소극적인 썸 끝에 키스하는 사이가 된 B는 내게 사람 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썸남에서 남자친구가 되었을 때 데이트의 주요 무대는 회사였다. 점심시간에 각자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나와 함께 밥을 먹고, 퇴근 후 가볍게 술 한잔하는 만남이 주를 이뤘으니 우리는 늘 출근할 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회사에서도 보고 평일 퇴근 후 데이트를 즐겼기 때문에 주말에는 각자의 친구들과 취미 활동에 자유를 주는 패턴으로 안착했다. 모처럼 각자 연차를 내고 회사 밖에서 만나는 첫 데이트 날, 나는 100m 앞까지 다가온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복장 규율이 엄격한 회사인지라 늘 양복을 입고 3:7 가르마를 한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역사를 알 수 없는 운동복에 크로스백, 머리에 까치집을 얹은 남자가 서 있었다. 목소리와 손의 촉감은 그가 분명했지만 낯선 냄새와 이미지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세 번 정도 주말에 그를 만나봤는데, 일상 속 그의 모습은 내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왠지 단단히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사람은 모두 환경과 공간에 따라 여러 개의 얼굴을 하고 살아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이토록 심하게 차이가 나는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가히 충격일 만큼 홀딱 깬 그의 모습을 내가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나조차도 예상할 수 없다.

나의 별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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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영화 ‘패션, 위험한 열정’
3년째 회사에서 나는 ‘아 걔’로 통한다. 남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우리 업계에서 여자 선배들이 누누이 했던 ‘회사에서 남자 만나지 말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듣고 넘겼기 때문이다.(이래서 어른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비밀을 전제로 시작한 연애는 헤어짐과 동시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그 소문에는 일방적인 감정이 섞인 오류가 가득했다. 하지만 가재는 게 편이라고, 내 입장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된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일도 일이지만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자세와 태도를 늘 품평 받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다. 억울한 이 상황을 꿋꿋이 버티려고 하지만 정신적 괴로움을 고스란히 받은 몸은 원형 탈모와 스트레스성 공황장애라는 병으로 나를 말린다.

자발적 죄인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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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영화 ‘오피스 크리스마스 파티’
사내 연애의 가장 큰 단점은 강제적 이별 후유증을 겪어야 한다는 데 있다. 동기 사랑이 열렬한 우리 회사에서 최근 나는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선언했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썸을 타고 본격적인 출근과 함께 연인으로 발전한 남자친구와 최근 3년간의 연애에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서툰 사랑이었지만 뜨거웠고 미련 없이 정리했지만 당사자들보다 이별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동기들이었다. 각자 바쁜 일정 속에서 헤어진 우리 때문에 모임을 두 번씩이나 갖고 경조사에서 벌어지는 미안하고 불편한 배려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동기 모임을 주최하는 친구에게 앞으로 나는 동기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별의 상처는 쓰린 가슴앓이가 아닌 우정을 잃는 씁쓸함으로 남았다.

민폐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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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영화 ‘타임투게더’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외국 속담이 있다. 집착성 사랑꾼의 기질을 타고난 C와의 연애는 사랑을 키우기 위해 온 회사의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입사와 동시에 이직을 준비한다고 하기에 사내 연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 만남이 내 퇴사의 원인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와 만남을 시작하고 두 달 만에 C가 이직에 성공한 덕분에 그가 퇴사하기 전까지 우리가 사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그의 집착이었다. 외부 미팅으로 한 시간 이상 연락이 되지 않으면 C는 나의 현재 동료이자 자신의 과거 동기들에게 전화와 문자로 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회사에 우리의 관계가 소문나는 건 당연히 시간문제였다. 처음에는 그의 갸륵한 사랑에 동정하고 도와주던 동료들 또한 집착적 연락에 서서히 지쳐갔고, 어떤 정신병을 가진 건 아닐지 걱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을 캡처해 보내며 그의 병적인 집착의 말로를 우려하며 뾰족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이 또한 적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팀의 민폐녀가 되었고 눈치를 보며 회사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일과 연애 모두 피폐해져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완전히 관계를 정리하기까지 장장 일 년이 걸렸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내겐 이직이라는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스파이 활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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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영화 ‘인굿컴퍼니’
어린 연차에는 소문이 제일 무서운 줄 알았던 사내 연애는 연차가 쌓이니 더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연인과 경쟁자라는 줄타기에서 상대가 나를 배신했을 때 극복하기 힘든 상처가 몰려온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각각 사회생활 6년차, 8년차로 같은 업무를 하지만 팀이 달랐던 우리는 사내 연애의 폐해를 주변에서 목격했기에 그 누구에게도 연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철저한 비밀 유지를 위해 데이트는 무조건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 외곽에서 했고 서로를 볼 때마다 욕망을 억제하느라 힘들었는데, 이 관계가 들통나게 한 건 다름 아닌 그였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가 전제가 되는 관계에서 상대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이다. 야심차게 계획 중인 프로젝트에 스트레스를 받아 칭얼댄 대화에서 그는 우리 팀의 핵심 전략을 빼앗아 갔다. 한껏 열이 받은 팀장이 눈에 불을 켜고 정보의 근원지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범인이 나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팀에서 6년간 쌓은 신뢰를 한순간에 잃고 말았다. 사랑보다 야망이 우선인 남자는 믿고 걸러야 한다는 교훈을 6년의 시간과 맞바꿔 깨달았다.

대외 커플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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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영화 ‘패션, 위험한 열정’
광고회사에서 만난 우리는 꽤 유쾌한 커플이었다. 지금은 각자 다른 애인을 만나고 있지만 여전히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우리 부모님도 그와 잘 만나는 줄 알고 계실 정도니까.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에게 굉장히 미안하지만 이건 다 우리가 너무 소란한 사내 연애를 했기 때문이리라. 사수였던 C와 이리저리 부대끼며 호감을 쌓고 사귀기에 이르렀을 때,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 덕분에 사내 연애를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우리는 커플임을 당당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마침 커플을 타깃으로 한 새로운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에 실험 대상이 되었다. 우리가 해당 제품을 사용하고 SNS에 후기를 올리는 방식이었다. SNS를 통해 우리의 만남을 알린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시작하게 됐고(어린 연차인 나는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 전문가들의 센스가 더해져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영광스럽게도 그해 이 프로젝트는 우리 회사의 메인 기획으로 자리매김하고 C와 나는 상징적 캐릭터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법. C의 발칙한 일탈로 우리는 파국을 맞았다. 문제는 나와 그를 주축으로 핵심 프로젝트가 된 상황에서 회사는 우리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매일 그의 얼굴을 보며 일하는 것도 괴로운데 지난날 아무 생각 없이 얼굴까지 공개했던 나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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