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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2020.05.22

버리면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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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음’ 표시에 대한 강박증이 있다. 이메일, 카톡, 문자 등에 붙어 있는 숫자를 보면 숙제를 다 끝내지 못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집요하게 ‘안 읽음’ 숫자들을 없앤다. 상대방은 내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생각할 텐데, 나는 그저 숫자만 없앴을 뿐이다. 머릿속은 아직도 ‘안 읽음’ 상태다. 같은 건으로 새로운 숫자가 생겨나고 사라진다. 동시에 업무에 하나둘 구멍이 생긴다. 읽기 싫고 피하고 싶은 메일과 문자를 스팸 처리하듯이 일도 클릭 하나로 단순하게 처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연이은 늦은 퇴근길의 나를 반기는 것은 현관 앞에 쌓인 택배 상자다. 어제 그제도 한차례 이들이 나를 맞이했다. 무엇을, 언제, 왜 주문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냉장고로 직행해야 하는 것들만 상자를 연다. 내용물만 간신히 확인한 다른 상자들은 베란다행이다. 이미 그곳은 사놓고 뜯지도 못한 택배 상자로 어수선하다. 그것들이 언제 쓸모가 생길지 모를 일이다. 그때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다. 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물건이라면 그건 낭비다. 시간 낭비, 돈 낭비, 감정 낭비. 이렇게 구입한 물건들이 내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답답해진다. 꼭 필요한 물건, 좋아하는 물건만 남기고 모조리 싹 다 없애야겠다 결심한 순간, 그건 또 다른 숙제가 된다. ‘언젠가 쓰겠지?’ ‘언제 다 해!’ 물건을 못 버리는 사람은 꼭 그렇게 말한다. 물건을 못 버리는 사람들의 흔한 핑계이고, 시간이 없다고 툴툴대는 사람들의 뻔한 핑계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안 읽음’ 표시가 눈에 거슬려 빨리 숫자를 없애고 싶을 만큼 빨리 정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쌓인 줄도 모르고 주문하는 택배처럼 차곡차곡 관계를 관행 처럼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숙제처럼 여기는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관계는 그 무게가 다 다른 법이다. 처음 손을 내미는 쪽으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니까. 서로 무감하게, 서로 무심하지만 그래서 차라리 더 편할 때도 있다. 넘치게 실망하는 법도 없다.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다. 그 사이엔 쉽게 무너지지 않는 힘의 균형이 있다. 담백하고 단단한 관계의 힘은 결속력이 없을 때 쉽게 균열이 생긴다. 분리된 관계는 오히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좋은 것만 곁에 둔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중요한 가치를 우선순위로 두고, 불필요한 것들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함이 있어야 하고, 선택의 기준은 단순할수록 좋다. 사소하고 꾸준한 것들이 하루를 바꾼다. 복잡한 일상은 최소한으로 단순하게 만든다. 그러는 동안 얼굴에 드러나는 건 주름이 아니라 살아온 인생이다. 굳은 다짐 같은 건 필요 없다. 이토록 어렵지만, 이토록 쉬운 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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