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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2020.06.17

멀티 페르소나의 힘

설득을 하려면 멀티 페르소나가 필요하다. 인간관계에서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써야 할 다양한 가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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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 속 조커는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흥분하지 않으면 싸울 일도 거의 없다. 상대방이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보편적인 경우에 한해서는 그렇다. 상대방의 차분함에 흥분으로 응수했다가 나쁜 사람이 되어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대형약국에서 일하는 약사 R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매일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매일 사람들이 마스크를 찾아 약국을 헤매고, 문의 전화가 빗발친다. 마스크를 구하지 못한 아쉬움은 약사에 대한 분노로까지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없어서 못 파는 게 아닌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손님들 때문에 R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같이 소리를 높여 싸워보기도 하고 사정도 해봤는데,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동료 약사 K는 표정과 목소리의 변화 없이 손님을 상대한다. 잠깐 짬이 나서 식사를 할 때는 평소와 다름없이 잘 웃고 밥도 잘 먹는다. 손님들에게 시달린 지 열흘째, K에게 “힘들지 않아?”라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요. 한 귀로 흘려듣고 제가 해야 할 말만 하는 걸요”였다. 그 말을 듣고 난 후 슬쩍슬쩍 K가 손님을 상대하는 것을 훔쳐봤다. 정말 손님이 아무리 화를 내도 표정의 변화 없이 신분증을 받아 확인하고, 결제한 후 마스크를 건넸다. 흥분하던 손님이 오히려 머쓱해하면서 되돌아갔다. 마스크 재고 소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크가 왜 없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손님 앞에서 K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와 말투로 “재고가 소진됐습니다”를 반복했다. 손님 입장에서는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게 자신을 지키는 나름의 노력인 것이다. 친절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손님과 싸우기만 했던 R과 달리 감정 소비를 하지 않으면서 원장님께도 좋은 인상을 남긴 것은 역시 K였다. 흥분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속만 쓰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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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 <기생충> 속의 비극은 기정(박소담)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빠 기우(최우식)의 학력 위조를 돕기 위해 포토샵으로 가짜 졸업장을 만들어냈고, 돈은 많지만 어딘지 모르게 순진한 박 사장네를 제대로 속인 것 역시 기정이다. 타인을 속이는 것은 물론 나쁘다. 하지만 설득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대를 내 페이스로 넘어오게 하는 것이니 어느 정도는 속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속이는 것에는 작전이 필요하다. 기정의 작전은 고전적 방법인 밀당이다. 박 사장네에 잘 보여야 기생할 수 있는 위치임에도 언제나 고고했고,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점이 박 사장(이선균)과 부인 연교(조여정)의 마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주위에 어떻게든 잘 보여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는 사람들만 가득한 그들에게 기정은 색다른 캐릭터였다. 마케팅회사에 다니는 B는 연차가 쌓이고, 팀의 막내에서 벗어났음에도 잡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분명 막내인 K가 딱히 일을 미루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늘 B가 일을 다 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바보였음을 깨닫는 중이다. 딱히 잘 보이려고 선배들의 이상한 부탁까지 들어준 건 아닌데, 점점 B는 모든 수발을 다 들게 됐다. 어떻게 K는 막내임에도 잡일을 피할 수 있게 됐을까. K는 선배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시간을 쏟는 대신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막내인 K에게 심부름을 시키던 선배들도 K의 “제가 이것까지 해야 하나요?”라는 말 한마디에 모두 깜짝 놀랐다. 자신들도 막내 때 그러지 못했고, 가장 최근 막내였던 B도 군소리 없이 따르던 심부름에 처음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사실 그들도 이 일이 막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저 당연하게 막내에게 전달된 일이었을 뿐. 하지만 업무와 관련된 일을 K에게 시켰을 때는 더없이 깔끔한 일 처리 능력을 보여줬다. 이러니 막내가 해오던 일을 계속 B가 떠안을 수밖에. B에게도 업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한데 이러다간 계속 뒤치다꺼리만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좋은 게 좋다는 것은 이제 정말 옛말이다. 갑자기 발을 빼기 어렵다면 조금씩 목소리를 내보자. 상대방의 반감을 사지 않는 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도 사회생활에서 꼭 필요한 스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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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서비스를 받고 기분 나쁜 사람은 없다. 대우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이 열린다. AI가 발전하고 로봇이 커피를 내려주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서비스업은 분명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다. 감정노동이 귀찮고 싫지만 스스로 선택한 인간관계에서의 서비스는 전혀 다른 문제다. 5년차 택시기사인 C가 운행을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환기다. 전날 차에 밴 냄새를 빼고, 은은한 향이 퍼지는 방향제도 뿌린다. 승객을 떠나 스스로 상쾌한 마음으로 운행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승객의 반응 역시 좋다. 택시에 타자마자 가장 먼저 느끼는 감각이 바로 후각이기 때문이다. 우선 타버렸는데 냄새가 좋지 않아서 내릴 수도 없고, 그 상태로 목적지까지 향하면 그날 손님의 하루는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C의 택시를 탄 손님들은 모두 기분 좋은 얼굴로 시트에 몸을 기댔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내렸다. 손님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C는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편이다. 대신 손님이 탈 땐 “안녕하세요”, 내릴 땐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인사를 건넨다. 별것 아닌 두 마디지만 덕분에 C의 기사 평가는 언제나 만점에 가깝다. 손님에게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말하고 나면 그의 하루도 좋은 하루가 된다. 동물 훈련사 강형욱이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개는 없다’라고. ‘나쁜 손님은 없다’라는 생각으로 손님을 대하니 C의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손님에게 부드럽게 내 방식을 전달했더니 부드러운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물론 100명 중 1명의 진상 손님은 어쩔 수 없지만. 3년차 승무원인 A는 동료들 사이에서 기억력이 좋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유난히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A는 사소한 일도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장시간 비행에서 그의 메모하는 습관은 더욱 빛을 발한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승객에게는 가능한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취향을 기억해뒀다가 한마디를 건네면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리기도 한다. 두 번의 기내식 서비스에서 모두 콜라를 마신 승객에게 세 번째 서비스에서는 “손님, 이번에도 콜라로 드릴까요?”라고 했더니 손님의 말투가 달라진 경험, 생각보다 꽤 많다. 대부분의 손님은 의외의 세심한 서비스에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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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 박서준, 김다미 키스신 짤보다 더 많이 도는 것이 유재명이 연기한 캐릭터인 장가 회장의 짤이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그의 독특한 리더십이 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심지어 악당임에도 배울 것이 많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우선 그는 꽤 고급스러운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구사한다. 주인공 박서준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나쁜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대화 속에는 이상하게 배려가 묻어 있다. 충분히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를 법한 상황에서도 “재밌구만. 흥미로워. 재밌는 친구구만”이라고 말한다. 말로만 재미있어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강한 정신력을 토대로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이 상황을 기회로 삼으려는 반전의 능력까지 가졌다. 게다가 가장 본받을 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에게 존대를 한다는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임에도 ‘라테는 말이야’를 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일단 듣는다. “아, 그랬군요. 무슨 일이시죠?” 등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기분을 상대방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진짜 악당들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친절하다. 언제나 여유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마지막 공격을 하기 전 네가 당하는 이유, 최악의 경우 네가 죽는 이유를 세세하게 설명한다. 무섭게 들리지만 어차피 당할 것이라면, 죽을 것이라면 왜 죽는지는 알고 죽는 편이 속 시원하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혼이 나면서도 그의 분노만 전달 받고 있으면 이 얼마나 억울한가. 적어도 왜 혼나는지는 알고 혼나면 답답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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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미지 메이킹이 중요하다. 처음 각인되는 이미지가 아주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사람에게서 예상 가능한 면만 보인다면 더 이상 신비감이 들지 않는다. 이 사람이 궁금하고, 이 사람이 하는 일이 궁금해야 일이 성사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반전 매력’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엇?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어?’ 하는 생각이 들도록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착하기만 하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화만 낸다고 일이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타이밍 싸움이다. 화를 낼 때와 착하게 대할 때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공연될 때마다 열광하면서 공연장을 찾는 것은 조승우가 주인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인격이 있다는 설정 자체에 연속적인 호기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는 수많은 비밀이 등장한다. 1화에는 다섯 명의 주인공 중 누가 재벌가의 아들인지 찾는 것부터 가볍게 스타트를 끊었다. 배우들은 1화 방영 전 가진 제작발표회에서도 자신들이 맡은 배역의 이름을 스포가 된다는 이유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이 외에도 극중에서 정경호가 군대를 면제 받은 이유, 김준한이 직업 군인에서 의사가 된 이유 등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비밀이 매회 등장한다. 신원호 감독, 이우정 작가의 드라마는 늘 그렇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늘 남편 찾기로 우리를 헷갈리게 했고,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정신 차린 듯 보였던 마약 중독자 해롱이가 출소 이후 바로 다시 마약에 손을 대 마지막 회에서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시청자들은 ‘또 남편 찾기야?’ 하면서도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전미도의 남편을 찾아 헤맨다. 이렇게 비밀이 많은 것은 언제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비밀이 필요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뻔히 보이는 사람보다는 늘 궁금하게 하는 사람에게 끌린다. 호기심이 생겨야 관심도 생기고, 그 관심이 일 또는 애정으로 변할 수 있다. 자신의 매력을 상대방에게 설득시키고 싶다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자. 조금 남겨둔 다른 얼굴은 상대방에게 분명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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