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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2020.10.22

가장 이기적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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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 죽겠다’는 말을 달고 지냈다. 자도 자도 피곤하기에 베개가 나와 맞지 않다며 온갖 종류의 베개를 끌어모았다. 여전히 목덜미와 어깨가 뻐근하다. 긴 연휴를 끝내고 출근하는 날에 더 피곤함을 느끼는 건 왜일까?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잠과 휴식을 구분하지 못해 생긴일이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잠은 필수품이고, 휴식은 기호품과 같다. 필수와 기호의 차이는 선택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휴식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그래서 휴식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질이 달라진다.

오랜만의 추석 연휴 기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지 마음먹었다. 코로나19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달렸으니 이 기간만은 어떤 일도 하지 말고 쉬자고 결심했다. 내게 쉬는 것이란 사실 침대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틀을 꼬박 누워 있었다. 목과 어깨는 쇠처럼 단단해졌다. 그동안 노고가 쌓여서 그런 거겠지. 시간이 갈수록 온몸이 더욱 굳어지는 것 같고 뭐가 문제인지 장도 심상치 않았다. 콧바람이라도 쐬야지. 이곳에 산 지 10년 만에 밤 산책을 감행했다. 그런데 온동네 사람이 모두 나왔는지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파워워킹에, 러닝에, 자전거에 나의 낮처럼 열심히도 달린다. 덩달아 나도 뛰었다. 숨이 가쁘고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산책 코스에 핀 코스모스는 달빛에 춤을 추고, 달리면서 마주 보게 되는 사람들은 비틀거리는 나의 뜀박질을 격려하는 듯 예의 바르게 길을 터준다. 마스크를 잠시 내리고 복식호흡을 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들어온다. 풀벌레 소리가 귀를 적신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이 나를 반긴다. 보름달이 인사한다. 아차, 오늘은 추석이지.

다음 날 같은 시간에 중학생 아들과 함께 밤 산책을 나섰다. 오늘은 작정하고 달려야겠다. 혼자보다 둘이 달리니 속도가 붙지는 않는다. 평소 바쁘다는 이유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으니 이때다 싶었다. 그런데 웬걸, 우리 아이가 이렇게나 잔소리가 심한 녀석인 줄 처음 알았다. 10초마다 잔소리다. 파워워킹해라, 입으로 말고 코로 숨 쉬어라, 사람 오니까 마스크를 써라, 보폭을 넓게 해라. 거참, 지적질 대마왕이다. 그런데 이 녀석, 세곡천을 따라 핀 식물들의 이름을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이런 것도 알고 있냐는 질문은 마음속으로만. 녀석의 이야기는 녀석의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열쇠다. 그러니 그 세계를 계속 엿보고 싶다면 말과 말 사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곡천을 이은 돌다리를 건널 때는 한 걸음 뗄 때마다 잔소리다. 조심하라고. 이 녀석이 그려내는 잔소리,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는 세상 처음이었다. 우리는 늘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어떤 감정도 나누고 있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저 흘러가기만 하던 수많은 시간과 기억들 중 이 순간의 냄새, 분위기, 지금의 모든 것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라. 연휴 기간의 나의 휴식은 느긋하게, 초조해하지 않고 사람을 지켜보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채워졌다. 뻣뻣한 목과 어깨가, 심지어 부은 다리가 부드러워졌다. 녀석과 나 사이에도 소소한 서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바빠 죽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내게 시간이 많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바쁨은 언제나 과대평가되어 있다. 가끔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삶을 낭비할 필요도 있다. 인생은 곧 사라져버릴 순간의 연속이니까. 오로지 나 하나만 생각했을 때 가능한 선택을 한다. 나를 위해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감을 수 있는 선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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