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가 확장한 세상

끊임없이 고민하고 용감하게 도전했다. 배우 김현주는 그렇게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BY | 2021.06.03
팬츠 슈트 YCH, 슈즈 지미추, 이어링 페르테.
어떤 배우를 좋아하게 되는 계기는 강렬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입덕’이라 불리는 이 체험은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듯 짜릿하다. 영화와 드라마 속 캐릭터,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행보, 그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분위기와 외모 등 확실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미지는 실체보다 강해서 대개 하나의 방향으로 좁혀진다. 그런데 김현주는 좀 다르다. 사람들이 이 배우를 좋아하게 된 작품과 이유는 하나의 이미지로 귀결되지 않는다. 켜켜이 쌓인 과거를 품은 변호사 한태주(<왓쳐>), 유쾌함과 독기를 오가는 <애인있어요>의 도해강, <가족끼리 왜 이래>의 씩씩한 차강심, 많은 여자들의 입에 인생 드라마로 오르내리는 <인순이는 예쁘다>의 박인순 등 각양각색이다. 특정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요리조리 얼굴을 바꾸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배우는 의외의 공간에서도 낯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튜브에 배우 김현주의 이름을 검색하면 길고 긴 필모그래피만큼이나 여러 작품의 현장 비하인드, 작품 홍보를 위한 인터뷰가 나온다. 그리고 그 틈에는 드럼 앞에 앉은 모습도 있다. 그 영상을 클릭하면 유재하의 ‘지난 날’, 마크 론슨의 ‘Uptown Funk’를 연주하는 김현주의 모습이 있다. 그는 박자에 따라 리듬을 타고 드럼 스틱을 과감하게 휘두른다. 연주자와 엔지니어만 겨우 알 것 같은 실수에서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처음부터 다시 연주를 시작하고 맹렬히 빠져드는 열정을 목격할 수 있다. 1997년 데뷔 이후 1년에 한 작품씩 성실하게 작업해온 배우 김현주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처럼 무궁무진하다. 4월 23일 첫 방송을 앞둔 <언더커버>와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연상호 감독이 연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또한 김현주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리다. 그는 도전이 두려웠다고 하지만 용맹하고 과감한 방식으로 자신의 방을 확장했다.
드레스와 이어링 모두 보테가 베네타.
톱 파코라반 by 매치스패션, 스커트 레하, 이어링 불가리.
촬영 세트를 만든 플로리스트가 꽃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며 놀라워하더라. 꽃꽂이를 오래 배웠다. 자격증도 있다. 법률 용어도 많이 알고 있나. 자격증은 없어도 <언더커버>까지 다섯 번이나 변호사 역할을 맡는 기록을 세웠다. 변호사를 많이 하긴 했다(웃음). 인물의 역할은 변호사였어도 그동안 직업적 전문성을 노출할 일은 많지 않았다. 아마 <언더커버>의 최연수가 변호사로서의 전문성은 가장 많이 보여줄 것 같다. 연수는 정의감을 바탕으로 자기감정에 솔직한 인물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어붙일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도 갖췄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견에 따라와주길 바라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 당당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지진희 배우와 세 번째 만남이라는 점에서도 화제다. 고백하자면, 지진희 배우와의 재회가 작품을 선택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애인있어요> 출연 이후 4년 만에 다시 만났다. 당시 캐릭터와 연기에 지진희 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번에는 거꾸로 지진희 씨 캐릭터 한정현의 감정이 더 살아야 하는 작품이다. <애인있어요> 이후 우리 두 사람의 재회를 원하시는 분이 많아서 그 사랑에 보답을 하고 싶기도 했다. 함께 작품을 했던 동료와의 재회는 어떤 시너지를 가져오나? 연기의 호흡과 합이라는 건 서로가 그 캐릭터에 얼마나 빠져 있느냐와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상대 배우를 향한 개인적인 감정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는 편하니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진희 씨가 가감 없이 말하는 솔직 담백한 스타일이다. 덕분에 발전적이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것 같다. <왓쳐>에 이어 <언더커버>와 방영을 앞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까지 장르물을 선택했다. 작품을 선택할 때 장르물이 큰 변수가 되지는 않았다. 우연의 흐름이다. <왓쳐>는 한태주라는 인물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세 작품은 캐릭터의 힘이 컸다. 방영 중인 드라마, 방영 예정인 작품 리스트를 보면 배우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 같기도 하다. 드라마 역시 대중문화이다 보니 시청자의 취향에 따른 유행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다양성이 많이 무너진 것 같아 아쉬운 부분도 있다. 배우들도 다채로운 연기를 보여주고 싶을 텐데 선택의 폭이 이미 한정적으로 정해지는 거니까. <언더커버>에서 한정현(지진희)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김현주에게도 그렇게까지 지키고 싶은 게 있을까? 아직 그렇게 처절하리만큼 지키고 싶은 건 없는 것 같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가족, 가정의 소중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실 그전에는 심도 있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혼자였고(웃음). 내게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친구보다 가까운 반려인과 인생을 끝까지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떤 형태든 내 가정을 이루는 게 인간으로서 한 번쯤 누려봐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드레스 레베카 밸런스 by 네타포르테, 이어링 불가리, 샌들 마놀로 블라닉.
올해로 데뷔 25년 차다. 아휴, 20주년을 기념해 팬미팅을 하고 그 이후로는 세어보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니 되게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사실 배우로서 작품에 임하는 자세나 태도, 생각은 변한 게 없는데. 누군가에게는 생애의 전부일 수 있는 시간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이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었나? 일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10년이면 오래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연기라는 일의 속성 덕분인 것 같다. 어떤 일이든 긴 시간 매진하면 실력이 늘지만 연기는 그렇지 않으니까. 실력이 늘었다거나, 줄었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직급이나 등급,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늘 새롭다. 작품에 접근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있을 법한 시간이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캐릭터, 상황,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이 더 우선된다. 연차가 쌓일수록 노력하는 부분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마음이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분위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이 있어서 어린 시절에는 도전을 꺼렸다.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에 추를 뒀다. 그런데 지금은 도태되고 안주하는 게 더 무섭다. 배우로서 갖게 되는 어떤 갈증, 성장하고 싶은 욕구도 점점 커진다. <왓쳐>가 그런 마음으로 임했던 작품이다. 유독 진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연기가 있다면. 예전에 액션 연기를 살짝 한 적이 있는데 굉장히 재미있더라. 내면에 파이터 기질이 있나 보다(웃음). 내가 몸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었다. 직업 만족도가 높은 편인 것 같다. 지금은 꽤 높다. 되새김질을 많이 하는 편이라 어떤 결과보다는 그것을 해내기 위해 준비했던 과정에서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언제 그만둘 수 있을까?’ ‘이번 작품만 하고 그만해야지’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트렌치코트와 레더 부츠 지방시, 이어링 불가리.
변화의 계기가 있었나? 스스로 일과 삶의 적정한 밸런스가 맞춰가면서 이루어진 것 같다. 직업 특성상 몇 달간 몰아서 촬영하면 공백기가 생기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다음 작품에 임하는 자세나 에너지,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치더라. 데뷔하고 10년은 일만 하며 열심히 달렸다. 쉴 때는 아무것도 안 했다. 10년이 넘으니 어떻게 하면 인간 김현주의 삶을 더 잘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더라. 나를 자꾸 들여다보고 성향을 인정하다 보니 방법이 보였다. 나는 혼자 있으면 굉장히 우울해지는 편인데 그렇다고 사람 만나는 걸 즐기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손을 쓰고, 움직이고, 뭔가를 배우러 다니게 됐다. 배우면 연습을 해야 하니까 가만히 있을 틈이 없다. <지옥>과 <언더커버>를 동시에 촬영했다고 들었다. 두 작품이 끝난 지금은 무엇을 배우고 있나? 새로 생긴 취미는 없다. 드럼과 바이올린 연습을 꾸준히 하고, 운동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의식적으로 하려고 애쓴다. 습관화하는 데 5년은 걸린 것 같다. 이제는 안 하면 몸이 아프고 게으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통 작품이 끝나면 여행 가고 쉬면서 4kg 정도가 찐다. 나는 그 몸무게일 때가 제일 행복하다(웃음).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집에만 있다 보면 마냥 늘어질 것 같더라. 그래서 작품이 끝나고도 휴식을 주지 않고 바로 운동을 시작했다. 아침에 무조건 9시 이전에 운동복을 입고 30분 정도 운동한다. 점심 먹고 나면 너무 졸리고 힘든데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한다. 요즘은 복싱을 좀 배워볼까 하고 있다. 테니스, 탁구는 배워봤고 골프도 조금씩 하는데 실력이 별로 늘지 않아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하는 상황이다. 여전히 너무 바쁘다. 아무 이유 없이 김현주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음악, 사랑 그리고 색. 특별하거나 대단한 건 아니다. 이를테면 물소리, 빗소리, 요즘 같은 계절에 핀 꽃의 색, 노을이 질 때 하늘의 색, 그리고 내가 이 모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이 세 가지가 없다고 생각하면 삶이 너무 건조하지 않을까?
재킷과 슬리브리스, 팬츠 모두 막스마라.
드레스 구찌, 이어링 페르테.
행복하려고 뭔가를 만들기보다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나. 주변에 보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 널렸다. 주어진 것을 갖고만 있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다.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 있다면. 멋진 사람,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 멋진 어른이란 어떤 사람일까?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된다는 말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멋진 어른이란 말과 행동에 책임질 수 있고 여유로운 시야를 가진 사람이다. 유연하고 넓은 시야로 후배들의 의견을 수용하기도 하고 선배들의 이야 도 경청할 수 있는 사람. 동시에 그들에게 내 의견을 강요하지 않더라도 말에 힘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더불어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지키는 원칙이 있을 것 같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내 감정이나 기분을 태도나 행동에 반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작품 속에서는 내가 주인공일 수 있지만 현장에선 아니다. 작품 하나를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노력한다. 그들이 다 나를 보고 있는데 내 감정만 생각하고 행동하면 현장을 망치게 된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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